감은사지를 막 벗어난 곳에서 만난 가을 햇살은 안개처럼 뽀얀 모습이다.
창밖으로 흐르는 풍경에 마음을 싣는다. 어차피 시간은 머무름을 허락치 않기에 주어진 삶의 방정식을 풀어가는 방법은 자신만의 숙제가 아니던가.
언제나 그렇듯 내 여행의 정점은 길에서 이뤄지고, 길에서 답을 찾는 일정이다. 그러기에 흐르고 멈추는 길위에서 담아내야 할 가을 이야기를 위해 단 한번의 스침조차 없는 낯선 길을 선택했다.
눈부신 아침햇살을 받으며 보문호에 있는 숙소를 떠나 길을 나섰다. 제법 알록달록 물든 나뭇닢들이 가을 분위기를 내는 호젓한 길을 올라 감은사지를 벗어나자 들판은 이미 누런 황금빛을 넘실거리며 가을이 깊었음을 알렸다.
그러나 그 흔한 네비게이션이란 것도 없으니 길옆에 차를 세운채 지도책을 펼쳤다. 어디로 가야 나만의 찬란한 가을의 전설을 찾을 수 있을까. 일단 바다를 보며 달릴 수 있는 해안길인 31번 국도를 타고 포항으로 오르기로 했다.
구포항이다. 시장이 섰는지 부적거림마저 정겨운 곳이었다. 햇살이 눈부시다. 그 투명한 햇살은 어느 한 곳 무심하게 넘기지 못하게 하려는듯 눈 길 닿는 곳곳을 가을속으로 침잠케 하고, 깊어진 가을은 소슬한 바람을 타고 끝 없이 들판과 바다를 향해 우리와 같은 속도로 질주 한다.
눈 앞에 펼쳐지는 바닷길의 오롯함을 즐기는 사이, 어느듯 구룡포가 다가왔다. 하얀등대가 보이고, 제법 커다란 항구가 부산하다. 방파제로 향하는 동안 바닷바람은 거침없이 햇살을 부숴내고 있었다.
방파제가 또 하나의 볼거리로 바다를 막고 있다. 펼쳐지는 바다는 아름다웠다.
바다를 오르는 길. 사다리를 타고 올라야 하지만, 아이는 혼자 바둥거리며 방파제를 오른다. 저 너머에 있을 바다는 왜 이렇게 단단하고 거대한 벽을 올라야만 마주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바람과 물결을 막은 둑 위엔 무더기로 쌓아놓은 그물이며 어구들이 나래비를 선채 가을빛에 뽀송하니 말려지며 나른한 휴식을 즐기고 있다.
정말 고요한 바다를 봤다.
평온을 위한 벽인가. 둑 위를 올라서니 바다가 환하게 열렸다. 등대아래 낚시대를 드리운 한사람이 멀리서 '평화'를 낚고, 잠잠한 물결위엔 가을빛이 부서져 내리는데 나란히 서 있는 등대는 기척이 없다.
너무 깊은 평화는 심심하다.
여기가 어딜까... 저 먼 어느세상에 들어선 느낌. 바람과 햇살과 바다와 들판이 그림이었다.
이때부터 길을 925번 지방도로로 바꿔야 한다. 그러나 길이 있다는 것은 '소통'이 이뤄진다는 것. 바다를 향해 황금빛 들판을 가로 질러 가는 아름다운 소통이 고즈녁한 가을을 그대로 드러낸다. 들판 끝자락에 바다가 머물고, 파란 바다 곁에는 황금빛이 일렁인다.
길이 있다. 바다로 향하는 길...
그 위를 가을바람은 바다와 들판을 편가름 없이 스치고 불어간다. 마치 기쁨과 슬픔, 그 어느것에도 치우치지 않는 '고요함'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전 하듯이. 그래, 가을의 가장 매혹적인 모습은 고요함 이다. 바람결에 햇살이 끊임없이 하얗게 반사된다
저 고불거리는 길을 따라 오르고 또 오르며 바다를 내려다 본다. 가을 바다는 고요함이었다.
가을빛의 농익은 자태는 밝고 고요하다. 잔잔하게 은빛으로 빛나는 바다와 투명하게 부서지는 햇살과 황금빛으로 출렁이는 자그마한 동리. 그 평화로움에 유년의 아름다웠던 기억속 동요가 낮으막한 콧노래속에 솔솔 풀려 나온다.
가을은 이렇게 깊어가고 나의 추억 갈피에는 '가을의 전설'이 쉼 없이 인화되어 갔다.
눈 길 닿는 곳, 바람이 스치는 곳... 그 모두가 '가을의 전설'이었다.
한개의 고갯길을 오르고, 하나의 모롱이를 돌때마다 바다가 열리고, 들판이 펼쳐진다. 내려다 보이는 바다는 영원을 향해 오르는 길처럼 까마득하게 멀기만 하고, 발 아래서 부서지는 파도는 현기증을 일으킨다.
나른한 가을바다를 포실한 가을 햇살이 휘감았다.
여전히 환하고 투명한 햇살은 보이는 모든 것을 눈부시게 하고, 가야 할 길은 마음을 재촉하지만 발걸음은 쉬 떨어지지 않은채 머뭇거림이다. 아쉬움속에 마지막 눈길을 주면서 나도 모르게 가느다란 한숨이 토해진다. 아름다운 곳
동동 떠 있는 구름사이로 아득히 포항제철이 보인다. 뜨거움이 담긴 모습이 반갑다.
다시 몇개의 굽이를 돌고 오르내리자 저 멀리 포항제철의 실루엣이 아련히 다가선다. 뭉글거리며 오르는 열기가 이 멀리서도 느껴질만큼 바다 저멀리의 '세상의 삶'은 치열하다. 마치 뜨거운 여름의 태양 없인 이 아름다운 '가을의 전설'이 엮이지 않는 것처럼.
그렇다. 살아 있는 시간동안 우리 모두는 머무름과 떠남의 욕망 사이를 끊임없이 이렇게 떠돌 것이며 그 경계를 넘나드는
곡예속에서 또 다른 삶의 희열을 느끼며 살아갈 것이다.
짙은 사연이 담긴 이번 가을여행은 붉은 저녁노을처럼 짙게, 오랫동안 기억속에 자리 하겠지.
귀로의 저녁하늘이 길고 뉘엿한 햇살을 꽤 오래 남겨 두었다. 아마도 먼 길을 되돌아가야 하는 내게 가을의 전설을 오랫동안 기억하게 하려는 아릿한 별리의 뜻이 아니었을까.
짧은 일정이었지만 그 어느 여행보다 긴 시간을 깊은 감동으로 채워냈던 이번 가을 여행은 그래서 더욱 눈 길 닿는 곳곳, 하늘과 땅, 바다와 부서지는 파도. 그리고 바람과 추억까지도 달구고 익혀내며 아름답고 소담스레 여물게 했다.
(*)이 길을 따라가면 구포항부터 등대박물관과 호미곶등 시원한 가을 바다와, 길을 따라 가득한 대숲이 바람결에 너울지는 모습과 낮은 언덕에 일렁이는 갈대밭등 이국적이고 아름다운 해안풍경에 흠뻑 젖어 볼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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