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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을 ‘빛과 벽돌이 짓는 시’라고 말한 건축가 김수근(1931~86)의 작품들은 요즘같이 해가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는 여름철의 아침 저녁무렵에 가장 감상하기 좋다. 담쟁이 덩굴이 덮인 그의 붉은 벽돌건물엔 벽돌요철이 삐죽삐죽 솟아 있는데, 그 요철이 빛을 받아 벽에 그리는 그림자들의 변주는 빛과 벽돌이 짓는 시이자 음악이다.
김수근의 건물이 근처에 7점이나 늘어선 대학로는 ‘김수근의 건축갤러리’라고 할 만하다. 14일로 타계 20주년을 맞는 그를 기리는 전시회 ‘지금 여기: 김수근’(7월28일까지)이 열리는 아르코미술관(구 문예진흥원 미술회관, 1977)과 아르코 예술극장(1977)을 비롯해 바로 이웃한 샘터 사옥(1977), 국제협력단건물(구 해외개발공사, 1976)과 대학로 서울대병원 안에 있는 간 연구동(1985) 등 다섯곳이 대학로에 있다. 걸어서 10분 거리인 원서동 공간사옥, 지하철로 두 정거장인 장충동 경동교회까지 범 대학로권이다. 대학로엔 특히 붉은 벽돌 건물이 많은데, 대부분 김수근의 건물을 흉내낸 것이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앞으로 30~40년만 지나면 김수근 선생의 건축은 분명 문화재로 지정될 것이며 그래야 마땅하다”고 전시회 오프닝에서 말했는데, 화답이라도 하듯 이번 전시에서는 특별히 ‘김수근 대표작 투어’(02-760-4602)를 마련했다.
김수근 건축기행은 원서동의 공간사옥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겠다. 담쟁이 덩굴로 덮인 공간사옥은 그가 건축주였던 만큼
가장 김수근다운 작품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벽돌로 쌓은 건물의 정문은 길가가 아니라 옆으로 살짝 비켜서 있고, 작은 방들은 숨바꼭질하듯 숨어있는 ‘공간들의 공간’이며 계단은 올라갈수록 좁아진다. ‘공간사’의 박성태 본부장의 안내를 받아 건물을 한바퀴 돌았는데, 도대체 몇개 층으로 되어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미로였다.
소극장 ‘공간사랑’이 있었던 지하 1층에서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모두 8개 층이나 되었다. 밖에선 4층쯤 되어보였는데 다섯계단쯤 올라가면 또 방이 나오고, 또 다시 몇계단 올라가면 또다른 방이 나오는 멀티플로어 구조다. 마치 신체의 장기처럼 여기저기 작고 큰 방들로 분절된 이 건물에서 사람들은 마치 혈관 같은 복도와 계단을 통해 여기저기로 흘러들어가는 혈액 같다. 승강기는 당연히 없다. 71년 앞쪽을 짓고, 77년 다시 뒤쪽건물을 이어 지었다. 후배 장세양씨가 97년 들어 지은 유리건물까지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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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본부장은 “67년 부여박물관이 일본 신사와 비슷하다는 왜색시비가 일고 난 후, 김수근 선생은 한국적 건축에 대해 매우 집착하셨고, 특히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영향으로 담양 소쇄원과 영주 부석사에서 많은 영감을 얻으셨다”고 설명했다.
창경궁과 이웃한 서울대병원 정문으로 들어가 바로 왼쪽엔 병원소개 지도에서도 찾기 힘든 김수근의 작품 간 연구동이 자리하고 있다. 역시 붉은 벽돌 건물로, 타계 1년전 완공됐다. 서울대병원을 가로질러 나가면 바로 대학로다. 서울대동문회관 오른쪽의 국제협력단(KOICA) 역시 붉은 벽돌로 지은 ‘김수근 브랜드’다. 김수근은 생전에 “암만 급해도 벽돌은 한꺼번에 쌓지 못하기 때문에 한장 한장 단정히 쌓지 않으면 무너지거나 제대로 힘을 받지 못한다. 그리고 벽돌이 지닌 조소성은 무한히 인간화되는 과정을 상징한다”고 ‘벽돌 예찬론’을 펼친 바 있다.
길을 건너면 이란성 쌍둥이 같은 아르코 미술관과 예술극장이 나란히 이웃하고 있다. 두 건물 모두 벽돌로 요철장식이 되어 있다. 빛이 비치면 요철벽돌은 해시계처럼 길고 짧게 벽면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예술극장도 공간사옥에서 보듯이 작은 방들이 미로찾기처럼 숨어있고, 계단은 올라갈수록 좁아진다. 그리고 모든 계단은 옥상으로 통한다. 계단을 따라 옥상으로 올라가면 하늘로 이어졌다가 끊어진 듯 뚝 잘린 계단을 만난다. 그의 20주기 기념전이 열리고 있는 이웃 아르코 미술관은 오랫동안 닫아놓았던 2층으로 연결된 통로를 이번엔 열었다. 소쇄원의 입구처럼 에돌아가는 사선의 통로는 험한 인생길의 은유같다.
역시 이웃한 샘터사옥의 1층은 원래 아무것도 없이 뻥 뚫린 통로였다. 지금은 커피숍과 아이스크림 가게 같은 것이 반쯤 들어서 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앞골목과 뒷골목을 연결하는 이 통로를 즐겨 이용한다. 원래 미술관 1층도 통로로 뚫으려 했지만, 당시 공무원들의 반대로 벽을 세우게 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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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을 타고 동대문운동장에서 내리면 경동교회가 가깝다. 빙 돌아서 건물 뒤편에 있는 정문으로 들어가는 큰 계단 사이로 군데군데 작은 모세혈관 같은 계단이 작은 방문과 연결되어 있다. 담쟁이 덩굴 드리워진 둥근 계단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교회가 아니라 산중의 절간 일주문에 들어선 것 같다. 시끌벅적한 동대문시장이 지척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계단 주변의 스테인드 글라스와 조각들을 보면서 한걸음 교회 문안으로 들어서면, 지금은 흔해졌지만 건축 당시만해도 파격적이었을 노출콘크리트의 검박한 벽면과 장중한 파이프 오르간이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한다.
-건축가 김수근은-
1931년 함경남도 청진 출생으로 서울대 건축과에 입학하던 해 한국전쟁을 맞아 석달 만에 학업을 중단했다. 이후 도쿄예술대학 건축과에서 박사과정까지 마쳤다.
김수근은 김중업(1922~88)과 함께 한국현대건축의 양대 산맥으로 꼽힌다. 김중업이 고구려의 선을 연상시키는 유려한 ‘선의 미’를 보여주는 건축가로 평가된다면, 김수근은 한국촌락이나 한옥의 분절된 공간이 이루는 군집된 ‘공간의 미’를 특징으로 삼는다. 대학로 인근의 건축물들 이외에도 워커힐 힐탑바(1961), 자유센터(1963), 정동경향신문사옥(1967), 올림픽주경기장(1977), 마산 양덕성당(1978), 서울법원종합청사(1986)가 있다. 공간건축사무소를 통해 배출된 제자들은 장세양, 민현식, 승효상, 우규승, 이종호, 유걸, 김종규, 김병윤, 김영준 등을 꼽을 수 있다.
77년 공간사옥 지하 1층에 들어선 소극장 ‘공간사랑’은 김덕수 사물놀이패, 병신춤의 공옥진 등을 배출한 공연예술의 전설적 공간이지만 지금은 문을 닫았다. 이를 기려 20주기 전시에서는 제1전시실에서 매일 공연을 연다. 타임지가 그의 공연예술에 대한 후원을 기려 ‘한국의 로렌초 메디치’라는 기사까지 실었지만 그는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난 철저한 에고이스트야. 솔직히 공연예술의 부흥과 우리 문화의 발전을 위해서 공간사랑을 만든 건 아니야. 난 외국에서 훌륭한 건축물을 보았을 땐 감동을 별로 못 받아. 하지만 좋은 음악이나 미술품을 보면 ‘이 느낌을 어떻게 건축으로 옮기나’하는 생각이 들고 영감이 떠올라. 그러니까 공간사랑은 다른 누구를 위한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거야.”
〈경향신문 : 글 이무경·사진 정지윤기자 lm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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