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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언제 저리 허리가, 부모님 세월은 천천히 갔으면

에스스C 2006. 8. 30. 15:23

시골집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붉은 고추가 주렁주렁 열려 있어야 할 고추밭에 열 그루도 채 안되는 고추만 남겨진 휑한 텃밭에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여름휴가 때인 8월 초에 왔을 때에도 시들시들 하긴 했지만 설마 다 죽으랴 싶었던 고추였습니다. 그런데 그 짧은 보름 사이에 손 쓸 틈도 없이 다 죽어버렸습니다. 작년에도 탄저병에 걸려 수확 한 번 제대로 못하고 고추를 다 뽑아버렸는데, 올해 또다시 죽어 이렇게 고추를 다 뽑아버렸습니다. 

 

텃밭뿐이 아니라 산 밑에 있는 고추도 다 죽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죽었냐고 했더니 볼 것도 없다면서 여기 텃밭처럼 죄다 뽑아버렸다고 합니다. 한 고랑이라도 살았으면 그나마 김장 할 정도는 땄을 텐데, 죄다 죽었으니 김장 할 일이 걱정이라 하십니다.


아버지는 지난 번 긴 장마에 알 수 없는 병이 들어 죽었다며, 하늘이 하는 일이니 할 수 없는 일이라며 애써 속상함을 감추십니다. 뭐라고 말이라도 해야 될 것 같았지만 생각나는 말이 없더군요.

 

작년에도 2번인가 따고 탄저병이 걸려 고추를 뽑아버렸는데, 올해는 수확도 한 번 못하고 고스란히 다 뽑아버렸습니다. 자식같이 여기고 키운 고추인데, 부모님은 자식 앞에서는 내색 않아셨지만 마음이 많이 아리실겁니다.

 

얼마나 수확했나 고추를 말리는 비닐하우스에 가보니, 손가락으로 세라고 해도 셀 수 있을 만큼 적습니다. 풍년이면 고추나무 열그루에서 수확 할 만큼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맘때면 이 비닐하우스가 수확한 고추로 가득 찼는데. 마당과 길가에 멍석을 깔아놓고 햇볕에 말리기도 하고, 비가 와 눅눅한 날이면 건넌방 아궁이에 불을 지펴 뜨끈뜨끈한 방에 고추를 말릴 정도로 그리도 고추를 많이 땄었는데, 고작 사료 포대 3개에 말리는 고추가 전부라니.


올해처럼 이렇게 완전히 고추 농사를 망친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멍하니 하우스 고추를 보고 있는데 어머니께서 들어오셔서는 잘 마르라고 뒤적거려 놓습니다. 아버지께서 속상하신지 "뭣 하러 뒤적거리느냐"고 하시자 "그래도 산 놈은 산 놈인 게 잘 대해줘야지"하시면서 부지런히 손을 놀리십니다.


속상합니다. 예전 같으면 고추가 다칠세라 나무로 만든 갈퀴로 족히 30여분은 넘게 고추를 뒤적거렸는데, 1분도 채 안돼 일어서는 어머니 뒷모습에 많이도 속상합니다. 어머니가 눈치를 채신 듯 “걱정하지 마라. 엄마야 너 안 아프고 우리 세린이 태민이 안 아프고 건강하게 크면 그것으로 됐다.”면서 하루가 다르게 굽어 펴지지 않는 허리를 피며 하우스를 나섭니다.

 

 

언제 저리도 허리가 굽으셨는지, 부모님 세월은 천천히 갔으면 좋겠습니다.

 

언제 저리도 허리가 굽으셨는지, 오늘 따라 늙으신 내 아버지 어머니 주름이 더 깊어 보이십니다. 오늘 따라 검버섯이 핀 내 아버지 어머니 손등이 너무도 앙상해 보이십니다. 오늘 따라 내 아버지 어머니 뒷모습이 이리도 작아 보일 수 없습니다.


작년에도 고추를 뽑아버리고는 그 속상함과 시름에 천천히 가도 될 세월, 훌쩍 건너뛰어 아버지와 어머니가 저에게서 저만치 달아났을지도 모르겠다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며 많이 슬펐었는데, 그래서 아버지 어머니의 세월만큼은 천천히 갔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올해도 또 같은 일을 당해 곡기마저 잘 드시지 않으니  슬픔에 앞서 이제는 자식으로서 걱정이 앞섭니다. 제발 남은 벼농사라도 별 탈 없이 풍년이 들어 살아가실 날들에서 우리 아버지 어머니 더 이상  마음 아픈 일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해 김치 담가 주실 때 세린이와 태민이가 위문 공연으로 춤을 추자 그리도 좋아하시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애들 데리고 금방 또 갈게요.

 

 

아버지 어머니! 살아생전에 효도 많이 해야 하는데, 두 아이를 키우면서도 아직 아버지 어머니의 마음 털끝만큼도 헤아리지 못하니 이만한 불효자가 없을 까 합니다. 못난 자식은 저희들 보내 놓고 휑한 고추밭 보면서 마음 아파할 아버지 어머니 걱정을 덜어드릴 길 없어 그저 이렇게 아버지 어머니께 몇 글자 올리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제일로 행복해 하시는 시간, 세린이와 태민이  재롱 보여 드리러 조만간 시골에 또 내려가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기름값 아끼라며 오지 말라 하시지만 돈이 얼마나 든다고.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 찾아 뵙는 데 그까짓 돈이 문제겠습니까.

 

아버지 어머니! 못난 자식은 아버지 어머니 이가 조금이라도 성하실 때 고기 한 점  못 사드린 것이 이리도 가슴에 응어리로 남을 줄 예전에는 미쳐 몰랐습니다. 나이가 들고 틀니를 하니 세상에 맛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지금에서야 맛있는 것 사드린다고 요란을 떠는 제 자신이 너무도 밉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어머니를 생각할 때 마다 지나쳐온 세월을 다시 되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면서 죄스러운 마음 피할 길이 없습니다. 못난 자식 이렇게 살아생전에 보고 싶은 자식 얼굴, 보고 싶은 손주들 얼굴 자주 보여 드리는 것 밖에 효를 다하지 못하니, 이 또한 한없는 죄스러움에 마음이 아픕니다.

 

아버지 어머니! 너무 늦지 않게 또 갈께요. 다시 뵙는 그날까지 건강하시고, 입맛이 없더라도 이 자식 생각해서라도 꼭 식사 챙겨드세요. 아침저녁으로 쌀쌀하니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시구요. 오래 기다리시지 않도록 조금만 있다가, 아주 조금만 있다가 아버지 어머니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금방 갈께요. 호박 넣고 맛있는 된장찌개 끓여 주세요. 


출처 : 취미/생활
글쓴이 : 장희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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